창설자
창설 배경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비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려는 17세기 프랑스 교회 영성의 흐름 안에서 그 당시의 엄격한 봉쇄생활 형태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기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어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 도시를 중심으로 지역 본당신부께 속하여 보호받으며 생겨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696년 샬트르 교구의 시골 마을 러베빌 본당 신부로 부임한 루이 쇼베(Louis Chauvet)를 통해 지극히 평범하고 겸허하게 특별한 이름도 없이 한 작은 공동체로 태어났다.
1700년
부활축일 경에 쇼베신부는 여아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고 공동체의 첫 원장으로 17세의 마리 미쇼를 임명하였다.
쇼베 신부와 함께 본회 창설에 몸 바친 귀족 처녀 마리안 드 티이는 1702년 11월 15일 첫 원장인 마리 미쇼의 사망 후에
공동체 자매들의 원의를 수락하여 원장이 되었다.
쇼베신부는 처음부터 그녀들에게 회색 옷을 입게 하고 엄률 수도원의 수도 규칙을 지키게 하였으며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약속을 하게 하였다. 수녀들은 스스로 생계를 벌었고 엄격한 극기 생활과 가난하게 살면서 맡겨진 사업을 되도록이면 무료로
해 주었다. 우리의 첫 사명은 여아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방문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이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었다.

- <프랑스 보오스 평야>
- <러베빌 성당>
- <러베빌 성당 내부>
1703년 9월 28일, 이 작은 공동체에 정신적 기초를 마련 해 준 마리안 드 티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수녀들에게 타격을 주었지만 그녀가 남겨준 수도생활에 대한 가르침은 풍요로운 영적자원이 되어 수녀들로 하여금 모범적인 생활을 하게하였으며 시련을 이겨내게 하였다.

- <레베빌 첫 공동체 요람>
- <아이들을 가르친 지하교실>
- <수녀들의 나막신>
1708년 수도회의 창설자 루이 쇼베 신부는 이 학교 수녀들을 샬트르의 폴고데 데 마레주교에게 겸손되이 위탁함으로써 러베빌에서 시작된 작은 공동체의 중심지가 샬트르로 이전 되면서 수도회의 성장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727년 소박하고 단순함으로 무장된 수녀들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침착한 대담성으로 군인들과 유형수들을 위한 병원이 있는 카이엔으로 첫 선교를 떠났다.하느님의 이 첫 부르심은 많은 수녀들의 마음 안에 해외 선교의 열정을 불 놓았고 이 선교의 열정은 1848년 중국, 1878년 일본, 1888년 조선으로 선교지를 확장해 나아갔다.
현재 전 세계 40개국에서 4천3백여명의 샬트르 성 바오로의 수녀들은 가난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아름다운 봉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루이 쇼베 신부
-
- 1664년 2월16일 뻬르뚜이에서 태어나 다음날
성 니콜라오성당에서 유아세례 - 1688년아비뇽에서 사제서품
- 1690년~1692년샬트르 교구 샹프롱 덩 가틴 본당 보좌
- 1692년~1694년러베빌 라셔날 본당 주임
- 1694년학교 처녀들의 공동체 설립
- 1696년부활 축일 경 여아들을 위한 학교 시작
- 1700년샬트르 교구장 폴고데 데 마레주교께 공동체를 맡김
- 1708년 6월21일 46세에 러베빌에서 선종
- 1710년
- 1664년 2월16일 뻬르뚜이에서 태어나 다음날
삶의 향기
1694년 6월 여동생 쥬느비에브와 함께 러베빌 라셔날에 도착했다. 그의 나이 30세, 본당은 아무도 돌보고 있지 않았고, 사제관은 사람이 살수 없는 상태였다. 쇼베 신부는 러베빌 본당에 자신의 전 생애를 헌신하기로 결심하였고 16년 후 그가 선종할 때까지 머물렀다. 쇼베 신부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고 의논하러왔으며, 그는 주의 깊게 본당의 노인들과 돌보는 이가 없는 사람들을 보살핌으로 본당의 모든 불쌍한 사람들의 믿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인 쇼베 신부는 또한 부자들의 고문역할도 하였으며 가족 간의 분쟁에서는 본당 사제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해야 할 의무 앞에서는 굴하지 않았고 종교적 무감각 상태와 싸웠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공부하고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기를 원했다. 루이 쇼베 신부는 변화를 일으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사제관 입구의 해시계에 새겨진 ‘Ultima Latet’ (최후의 시간은 미지의 것) 라는 글자와 함께 그분의 현존과 사도직을 향한 그분의 헌신과 열정은 본당생활을 공동체로 만들어냈다.
- <러베빌 라셔날 본당 사제관>
- <사제관 침실>
- <사제관 입구 해시계>
쇼베신부에 대한 증언
- -시작부터 샬트르 교구 내 러베빌 라셔날의 덕스러운 본당사제가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 우리를 불러 모았다.
(마리안 델랑드르 총장) - -성 바오로 수녀회는 러베빌의 본당신부인 쇼베 신부의 보호 하에 새로운 세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분은 많은 수도 공동체들이 도시와 큰 도시에 세워지고 대부분의 시골 변두리 본당들은 잊혀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분은 몇 명의 젊은 처녀들을 모아서 양성하고 후에 가장 버림받은 곳으로 이들을 파견했다.
(샤를르 드 트루쉬 신부) - -러베빌의 새 사제의 고상한 존엄성과 덕성은 그분의 성품과 받은 은총의 선물 안에 드러난다.
두해동안 그분은 관찰하고 듣고 질문을 하면서 기도하였다. 그래서 보오스 지방을 괴롭히는 만연한 뿌리를 알아듣게 된다. (쟝 보동 신부) - -귀 수도회는 대단히 아름다운 초자연적인 창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창설자는 그의 재산을 내놓아 스스로 가난해졌으며 일과 궁핍으로 건강이 쇠약해져 8일간의 병고 끝에 46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새로 태어난 공동체는 과감한 종교관과 절대적인 가난을 요구하는 엄격한 규율 때문에 그 시대 양식인들의 조롱과 중상 모략,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참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창설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으니 곧 복음에서 말하는 형제적 애덕이 온통 그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루이 다비드 신부)
쇼베신부의 유서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서 데려가실 때, 나의 시신이 어떠한 장엄예절도 없이 본당 사제들을 위한 통상적인 장소인 중앙 제대 앞쪽의 가대에 묻히기를 바란다. 이 모든 것들은 소르본느 박사이며 샬트르 성모 대성전의 참사위원이며 블루와의 부주교이신 끌로드 마레쇼 존하의 손에 맡겨드린다.
이것은 시작한 나의 사업을 후원하고 가난한 처녀들을 학교의 훌륭한 교사로 양성하는데 쓰일 것이다.
공동창설자 마리안 드 티이(Marie – Anne de T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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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5년 3월 8일샬트르 교구 알렌 본당에서 세례 받음
- 1678년어머니의 죽음
- 1684년아버지의 재혼
- 1694년러베빌 본당 관할 구역인 계모의 집 아봉빌로 이사
- 1696년학교 처녀들의 공동체 설립
- 1700년부활 축일 경 여아들을 위한 학교 시작
- 1701년계모의 집에서 쫓겨남 (카트린느 드 벨루이 집에서 거주)
- 1702년 11월 5일첫 원장 마리 미쇼 사망 및 공동체의 원장
- 1703년 9월 28일38세에 수녀들의 요람에서 선종
삶의 향기
<마리안 드 티아가 세례받은 알렌성당>
일찍이 어머니를 여윈 마리안 드 티이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보살피고
무능한 아버지를 돌보며 계모의 신경질을 견디며 집안 살림을 살아야 했다.
무능한 아버지를 돌보아야 했고 계모의 신경질을 견뎌야했다.
이런 시련들이 그녀를 성숙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난 쇼베 신부의 도움을 받아 더욱 투명하고 활성화된 깊은 신심생활로 선행과 자기 이탈의 삶을 살게 된다.
좋지 못한 취급과 욕설 등 온통 부패로 가득 찬 세상을 완전히 떠난 마리안 드 티이는 사랑하는 <<영적 자매들과 함께 할 때에만 숨을 쉬고 살기를 시작했다>>고 유서에 적을 만큼 그녀들은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였다.
기도와 그리고 성화의 삶을 통하여 그들과 하나 되어 그들의 종교적 이상을 위한 모든 열성을 본당에 불우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학교의 좋은 여교사들을 양성>>을 목적으로, 수도자로서 이 일을 해나갈 수 있도록 교육하며 헌신적인 어머니역할로 그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 공동체에서는 사사롭고 인간적인 이익을 추구함 없이 모든 것이 하느님을 위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마리안 드 티이는 그의 생애가 끝날 무렵 <<이 가난한 처녀들을 향상시키려고 착수한 거룩한 소임을 하직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마리안 드 티이에 대한 증언
- -러베빌 라셔날의 공동체 소속인 집의 한 변변치 못한 방에서 병으로 인하여 침상에 누워있기는 하나 정신과 이해력이 건전한 상태에서 맏딸로서 권리를 향유하고 또 구사하는 귀족처녀 마리안 드 티이가 ...
(공증인 마튀렝 시루) - -1703년 9월 28일, 빌르가의 영주인 기사 고 루이 드 티이와 알렌의 귀부인 고 마리안 드 훼니에르의 영애로서 그녀가 원장으로 있었던 러베빌의 처녀들의 학교에서 귀족처녀 마리안 드 티이는 36세쯤된 나이로 러베빌 라셔날의 본당 사제인 나에게 고백성사를 받고 우리 주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신다음 내 손에서 종부성사를 받고 운명하였으며...
(루이 쇼베 신부) - -저는 지금 마리안 드 티이 원장님께 와 있습니다. 사실 공동체의 모든 생활은 항상 그분께 달려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은 학교처녀들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수녀들에게 1년동안 그의 무덤에 와서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분이 예견했던 그 무섭고 잔인했던 싸움은 이날로써 끝이 났습니다. 그분의 생각이 옳았습니다.
(루이 다비드 신부) - -마리안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창설사에 있어서 하나의 빛으로 떠오른다. 그의 생애 안에서 수도회 창설의 카리스마가 표면화된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것, 자기 비움과 가난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 동참하여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닠 베르트랑 총장)
마리안 드 티이의 유서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1703년 7월 17일 이 유서를 작성하고 있는 나 마리안 드 티이는 러베빌-라셔날 학교 처녀들의 원장으로서
가난한 네 명의 처녀들이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읽기와 쓰기, 그리고 신심 면에 있어서 완성되도록 애쓰고 있다.
내가 속세를 떠나 하느님과 성교회의 선익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나를 바쳤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나를 거슬러
온 학대와 욕된 말들로 인하여 기력이 모두 쇠진하기에 이르렀으니...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원하신다면 지금까지 세상의 부패함을 맛본 만큼 나는 조금도 아쉬움
없이 떠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사람들의 악의로 인해 가난한 처녀들을 향상시켜 주기로 계획해 왔던 이 거룩한
소임에서 손을 떼는 것이 몹시 괴로울 뿐이다.
나는 그녀들과 함께 할 때에만 비로소 숨을 쉬고 살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여겨졌다.